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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진주형평운동 100주년 - 형평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 정신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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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수상한 MBC 경남 <어른 김장하>를 보면서 형평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김장하 선생님의 다큐는 최근에 본 영상 중에 가장 감명 깊고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이 지원하신 많은 영역 중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있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는 형평운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자세히 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 사진
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 출처: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형평운동이란 무엇인가요?

1923년부터 경상남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입니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습니다. 백정들이 작업할 때 쓰는 저울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 지식인들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형평사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속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고, 일제탄압을 받게 되면서 점차 위축되었고 1935년 4월 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대회 때 단체의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꾸면서 인권 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백정들은 어떤 차별을 받고 있었나요?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 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백정들은 대대로 가축을 잡는 일을 하거나, 가죽제품이나 버들고리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노비나 무당 등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은 대우를 받았던 탓으로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사람들의 오랜 뇌리와 습성은 남아있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정은 사는 곳도 제한을 받았고, 태어나도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이름자는 석(石), 돌(乭), 피(皮)와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하여지었으며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혼인도 백정끼리만 가능했습니다. 신랑신부는 가마나 말을 탈 수도 없었으며,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했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습니다. 명주옷 두루마기를 입을 수도 없었고 갓 대신 패랭이를 썼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집을 화려하게 짓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도 상복을 입지 못했으며 일반인의 묘지와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상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를 잡고 고기를 다룬다는 이유로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뿌리 깊은 악습이었습니다.

 

형평운동의 역사적 배경 - 형평운동은 왜 진주에서 먼저 일어났나요?

진주교회 동석예배 

1909년 8월 경남 진주시 진주교회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호주의 라이올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귀천이 없으며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백정신도도 일반신도와 합석해서 예배를 올리도록 주장했고, 봉건적 의식을 가진 신도들의 여러 차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올렸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했습니다. 백정도 다른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난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형평운동) 단체인 '형평사'가 출범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진주지역의 역사적·사회적 조건

1920년대 초 진주에는 각부문에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한 민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동공제회가 이끌었던 노동·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여성운동 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게 됨에 따라 근대적인 공·사립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이 각 부문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직업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주항쟁이 진주의 정치·문화적 기반의 기초가 되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진주는 농민군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백정사회에 축적된 경제적 기반

전통적으로 백정들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던 도살업, 고기판매업, 유기제조업 등 특수한 직종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일반인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19세기말부터는 도살업이나 고기판매업이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갈 정도였습니다. 1920년대 초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진주공설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백정 상인들이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형평사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실무 임원진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형평운동의 의의

우리나라 최초의 반차별 인권운동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평사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고 선포하였는데, 이는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UN)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었습니다. 40여 년간 형평운동 연구에 매진한 김중섭 경상국립대 명예교수는 "형평운동은 인간존엄과 평등사회를 이끌어가는 근대역사의 출발점이자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연대정신

형평운동은 백정들만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천대받던 백정들과 지주의 선각자들인 비백정이 연대해서 평등을 함께 외친 연대정신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백정 중에서도 부유한 백정이 앞장섰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백정과 비백정이 하나로 모여서 시작한 공동체 운동이었습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형평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형평운동 70주년을 한해 앞둔 1992년 4월 24일 진주시 동성동 남성당 한약방에서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이사장은 김장하 선생이었습니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형평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다양한 활동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형평 100년, 그래서 백정은 사라졌나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백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여러 모습의 다른 차별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자던 형평운동의 높은 이상은 오늘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어서 그때의 운동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여성, 장애인, 아동, 난민 등 여전히 차별받는 집단이 존재하며, 지역 간의 차별, 빈부의 차별도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당시 형평운동을 주장할 때 반대하는 일반인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혐오와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존엄과 평등 대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제도화하고자 했던 형평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또한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공동체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각자도생의 현대사회에서 공동체 운동인 형평운동의 가치를 떠올리며 차별받는 이들과 아닌 사람들이 연대하여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주에 형평운동을 기념할 만한 공간과 상징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강상호 선생 묘소, 신현수 선생 송공비, 형평기념탑, 진주교회 정도라고 하는데요. 김명희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형평운동의 형평운동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재평가하고, 형평 인권박물관을 건립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형평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형평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인권 교육의 장소가 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진주라는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른 김장하>의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형평운동에 대해서 알게 되고, 역사적 재평가를 받음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형평 인권기념관이 건립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김장하 선생님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형평운동의 가치를 되새기고, 불평등·차별·부정의와 평생 싸워오셨던 김장하 선생님의 도덕적이고 일관된 삶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본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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